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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정

정경화 바이올린 독주회-대구문예회관 기획공연

정경화 바이올린 독주회-대구문예회관 기획공연 대표이미지
  • 기간 2012-03-27(화)
  • 시간 20:00
  • 소요시간 100정도
  • 장소 팔공홀
  • 주최 대구문화예술회관
  • 문의 1588-7890 / 606-6131~4
  • 특이사항 및 할인조건

    선택사항 및 할인조건 :
    <관람등급> 8세 이상
    <할인>
    30% 할인 - 단체 20명 이상 30% 할인 적용
    50% 할인 - 65세 이상 경로 및 장애인 본인 1명
    * 본인이 아닌 경우 차액금을 지불 하셔야 합니다.


공연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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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정 경 화| Violin

케빈케너| Piano


Mozart : Violin Sonata No. 33 in E flat Major KV 481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33번 E flat 장조 KV 481

   I. Molto allegro

   II. Adagio

   III. Allegretto

Beethoven : Violin Sonata No.7 in c minor Op.30-2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7번 C단조 Op.30-2

   I. Allegro con brio

   II. Adagio cantabile

   III. Scherzo Allegro

   Ⅳ. Finale Allegro vivace


--Intermission--


Prokofiev : Violin Sonata No.1 in f minor Op.80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단조 Op.80

   I. Andante Assai

   II. Allegro Brusco

   III. Andante

   Ⅳ.Allegrissimo


Szymanowski : Noctturno e Tarantella Op.28



 

Violinist 정경화  The Legend --------------------------------------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전 ‘객석’ 편집장)

대한민국 클래식 No.1의 전설

딸의 재능을 발견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 이원숙 여사(2011년 작고)는 두 살 때부터 노래를 곧 잘하던 셋째 딸 경화를 관찰했다. 딸의 음정은 완벽했다. 어머니는 경화에게 노래를 시켰다. 경화는 여러 작은 동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제 어머니는 경화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때는 1950년대 초. 6.25 전쟁 통에 부산까지 피란 내려와 있던 때였다.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도 서울로부터 피아노를 싣고 올 정도로 열성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왠지 달랐다.


경화는 피아노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녀에게 신이 내린 악기는 따로 있었다. 언젠가 어디선가 바이올린의 음색을 듣고 그 자리에서 매혹된 것이다. 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한 그녀는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놀라운 집중력과 엄청난 속도로 바이올린의 모든 것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딱 두 번 레슨을 하고 초등학교 입학식 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모조리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배운지 3개월 만에 나간 콩쿠르에서 3년 넘게 배운 언니를 제치고 1등을 했다. 신동 연주자 정경화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홉 살의 나이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서울시향과 협연했다. 시간은 흘러갔다. 그녀는 한국의 유명한 콩쿠르를 모두 휩쓸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음악적 성장을 고려할 때 한국땅이 좁게만 느껴졌다. 결국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게 됐다.

1960년 당시 16세, 12세에 불과하던 명화, 경화를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보낸 어머니는 2년 뒤 다른 자녀들까지 모두 데리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집안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시애틀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뒷바라지했다. 레슨비 대기도 빠듯하던 시절, 웬만한 악기 한 대 값은 집 한 채 값에 육박했다. 어머니는 집안 형편을 솔직하게 알리고 어려움도 체험하게 하며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레슨이 없는 시간이나 방학 때면 명화, 경화, 명훈은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돕곤 했다. 줄리어드에서 플루트를 전공하며 미국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장녀 명소(2007년 작고)의 도움으로 정경화는 줄리어드 음악원의 프리 칼리지 과정에 오디션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자신 있게 임한 오디션은 성공적이었다. 정경화에게는 줄리어드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전설적인 바이올린 교수인 이반 갈라미언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스파르타’ 갈라미언을 견뎌낸 줄리어드 시절

이제 정경화는 1960년대 동양에 있는, 전쟁을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나라의 연주가가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한류라는 말이 존재하지도 않을 때, 아무도 한국을 모를 때, 그 미답지를 가장 먼저 밟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줄리어드에서 공부는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은 높았고, 당시만 해도 극히 드물었던 동양인이어서, 그녀가 느끼는 자신의 모습은 늘 뉴욕의 이방인이었다. 정경화는 한국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유망주였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줄리어드였다. 세계 최고의 젊은 영재들이 실력을 연마하는 장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당시 자신이 가진 재능의 칼이 동료와 선후배들보다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역력히 깨달았다. 자신이 직면한 도전 앞에서 정경화는 자신을 더욱 드러내기로 결심하고 온종일 연습에 매달렸다. 연주 중에 한 음이라도 틀리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거의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였다. 실수한 날이면 집에 가서 스무 시간 동안 같은 곡을 계속 연습한 적도 있었다 한다. 가족들은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갈라미언은 엄한 스승이었다. 도로시 딜레이를 아테네에 비유한다면, 갈라미언은 스파르타였다. 갈라미언의 훈육을 견디지 못하고 줄리어드를 그만 둔 제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부지런히 자신을 연마하는 정경화에게 갈라미언의 방식은 그녀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갈라미언의 가르침을 받는 기간동안 정경화의 연주는 두드러질 정도로 무르익었다. 그러나 갈라미언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편견을 가진 스승으로 악명 높았다. 정경화의 재능은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기껏해야 평범한 직업 연주가로서의 길을 걷게 될 거라고 갈라미언은 생각하고 있었다. 갈라미언은 늘 정경화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앞날이 촉망되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결혼을 선택하면서 연주가 퇴색되는 것을 몸소 많이 보아온 갈라미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정경화는 결혼과 출산 후에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영위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게 된다.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 빛나는 커리어의 시작

 정경화는 오래 전부터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콩쿠르에 참가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었고 적국이었던 소련과 대한민국 간에 긴장이 팽팽했기 때문에, 그녀는 참가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1967년 정경화는 에드가 레벤트리트 콩쿠르에 참가했다. 이차크 펄만이 우승했던 저명한 대회였다. 그러나 정경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콩쿠르 참가를 말렸다. 매니저 역시 만약 정경화가 참가했다가 우승을 못할 경우 앞으로의 경력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장애물이 될 거라고 정경화를 설득했다. 이반 갈라미언도 정경화의 레벤트리트 콩쿠르 참가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역시 그의 제자였던 핀커스 주커만도 참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음악계를 주무르는 유태인 파워의 우두머리격인 아이작 스턴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던 주커만이 우승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던 콩쿠르였다.


정경화는 굳은 결심으로 무장하고 콩쿠르에 참가했다. 정경화의 바이올린이 빛났다. 레벤트리트 콩쿠르 본선에서 파죽지세로 최종무대까지 올랐다. 예상대로 핀커스 주커만도 올라왔다. 결선 마지막 무대가 끝이 났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정경화와 주커만 중 1등을 누구로 할 것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때, 아이작 스턴은 정경화와 주커만에게 한 번씩 더 연주하도록 주문했다. 그렇게 두 연주가는 한차례씩 연주를 더 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여전히 결정을 못했다. 결국 레벤트리트 역사상 최초로 정경화와 주커만, 두 명의 공동 우승자를 내기로 했다. 이것은 정경화에게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레벤트리트 콩쿠르의 기준은 높고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조금이라도 연주에 흠결이 보이면 웬만하면 우승자를 내지 않는 것이 일쑤였다. 당시 27년의 콩쿠르 역사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우승자를 낸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정경화의 기량이 성숙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런던에서 대성공과 데카 레코딩 계약

 콩쿠르 우승 직후 정경화의 커리어가 시작됐다. 시카고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등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컨디션이 악화된 나탄 밀스타인을 대신하여 백악관 갈라 콘서트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아직 세계 음악계에는 정경화의 이름이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고 있었다. 그녀의 연주가 화려하게 각광받은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22세의 정경화는 19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데뷔 무대를 가졌다. 연주 곡목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당일 3시 리허설에 참석하기 위해 로열 페스티벌 홀로 갔는데 총 단원 수의 1/3에 해당하는 단원들만 남아있었다. 프레빈은 “오케스트라측이 갑자기 레코딩 스케줄을 잡았다. 젊은 연주자의 데뷔를 이런 식으로 치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른 날로 연주회를 변경하면 어떻겠느냐?”고 정경화에게 말했다. 정경화는 프레빈을 설득했다. “우리 모두 이 협주곡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연주 합시다.” 결국 정경화는 1/3의 단원들로 리허설을 하고 공연시간이 되자 나머지 단원들이 합류해 연주를 시작했는데, 모든 단원들이 초긴장 상태로 공연에 임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임해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이끌어냈다.


런던에서의 성공은 정경화의 앞날에 대단히 큰 의미를 던져주었다. 영국에서 연주회 요청이 쇄도했고 데카/런던 레이블과 독점 레코딩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다.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와 협연해 차이콥스키 협주곡과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녹음한 데카에서의 데뷔 음반으로 정경화는 국제적인 무대에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음반은 성음에서 라이선스 LP로 발매되어 국내 라이선스 음반 1호를 기록했다.

정경화의 첫 녹음, 차이코프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처음 들었던 날이 떠오른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다름 아니었다. 시퍼런 날을 허공에 번뜩이며 활은 신들린 듯 질주했다. 바이올린은 현을 뿌리치며 슬픈 듯이 울부짖었다. 영감이 가득했던 그 연주에 놀란 서양인들은 그녀를 ‘바이올린을 든 마녀’라고 불렸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 가운데 바이올리니스트가 레슨을 받다가 실수를 지적당하자 “난 정경화가 아니에요!”하고 울면서 뛰쳐나가던 장면이 있었다. ‘한 음이라도 틀리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정경화의 치열함은 평범한 TV 드라마에까지 곳곳에 미치고 있었다. 1973년 빚을 안고 25만 달러짜리 악기를 산 정경화는 돈을 갚기 위해 싸구려 삼류호텔을 전전했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 관련 인프라가 허허벌판 같았던 시절 정경화는 장애물경기를 하듯 혼자서 커리어를 개척해 나갔다. 지금도 나는 이 시절 정경화의 연주야말로 별다른 수식어 없이 손에 쥐어지는 듯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진짜 음악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악과 예술의 지평을 넓힌 시게티와의 만남

 정경화는 유럽에서 갈라미언에 이어 두 번째 스승을 만났다. 다름 아닌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였다. 시게티는 정경화의 바이올린 연주기법을 정제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시게티는 정경화에게 독서를 권하며 미술관에 가 보라고 했다. 정경화는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이때의 체험으로 회화, 조각 등 비주얼한 예술적인 표현을 음악적인 언어로 변용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정경화는 세계 각국에서 연주하면서 거의 모든 공연에서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베를린 필, 빈 필, 런던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 등 세계적인 주요 오케스트라들은 앞 다퉈 그녀를 초청해 협연했다. 게오르그 숄티, 앙드레 프레빈, 사이먼 래틀, 클라우디오 아바도, 샤를 뒤투아, 리카르도 무티 등 거장 지휘자들과 연주하는 한편, 라두 루푸, 크리스티안 침머만, 피터 프랭클, 스티븐 코바세비치 등 최고의 피아니스트들과 실내악을 연주했다. 언니 정명화, 동생 정명훈과 함께한 정 트리오와의 활동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졌다.


정경화가 연주한 협주곡 레퍼토리는 베토벤, 차이콥스키에서부터 알반 베르크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EMI), 프랑크와 드뷔시 소나타(라두 루푸의 피아노, Decca), 레스피기와 슈트라우스 소나타(크리스티안 침머만의 피아노, DG, 그라모폰상 실내악 부문상 수상) 등 실내악 음반들도 발군이다. 정경화의 연주는 열정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구조적으로 짜임새가 탄탄하며, 음색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변주된다. 특히 초창기 데카에서의 녹음은 정경화의 완벽주의가 반영된 놀라운 완성도를 들려준다. 데카에서 자신의 첫 브루흐 협주곡을 레코딩할 때 정경화는 로열 필하모닉을 지휘한 루돌프 켐페의 밸런스에 놀랐다고 말한다. 2악장 메인 튜티에서 피아니시모 같은 부분은 오늘날에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라는 그녀의 말이다. 켐페의 지휘는 “레코딩에도 혼을 담는다”는 것을 실감케 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1997년, 정경화는 세계무대 데뷔 30주년을 기념하여 런던 바비칸 센터와 고향인 서울에서 무대를 가졌다.


데카에서 EMI로 이적해 녹음한 음반 발매도 이어졌다. 비발디 ‘4계’는 그라모폰지의 에디터스 초이스로 뽑혔다. 텐슈테트와의 두 번째 브루흐 협주곡 녹음(EMI)은 데카 때와는 달리 순음악적인 해석이었다. 스튜디오를 극히 싫어한 지휘자 때문이었다. 텐슈테트와 시벨리우스 협주곡 녹음이 예정됐었지만 텐슈테트의 스튜디오 공포증 때문에 무산된 것은 애호가로서 아쉽기만 하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빈 필과 협연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 교향곡 5번과 커플링돼 발매됐다. 이 앨범은 2001년 국내외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화제가 만발한 음반이었다. 원전연주를 연상시키는 파격을 동반한 베토벤 ‘운명’과 그에 비해 한결 무뎌진, 굳은 살이 톡톡한 브람스 협주곡. 한 마디로 혁신과 보수를 동시에 한 배에 태운 음반이었다. 정경화의 브람스 협주곡은 ''동양의 마녀‘란 별명이 무척 잘 어울리던 젊은 시절의 쌩쌩 부는 찬바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변화를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과거의 몰아치던 열정이 서서히 익어간, 느긋한 여유와 내공이 느껴지는 브람스 협주곡이었다.


비르투오시티의 화신에서 경륜의 예인으로

 1984년 결혼과 출산 이후 정경화는 한없이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어느날 문득 스트라디바리가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아님을 깨달았다는 정경화는 과르네리로 악기를 바꾸었다. 명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릭과 마이클 라빈의 손을 거친 명기다. 최근에는 과르네리 한 대를 더 구입했다. ‘에튀드’로 유명한 피에르 로드가 사용하던 과르네리다. 정경화가 쓰던 옛 스트라디바리는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2007년부터 모교인 줄리어드에서 후진을 양성해 오던 정경화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2005년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키로프 오케스트라가 내한했을 때 정경화는 2005년 9월 23일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28일에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각각 협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3일, 손가락이 아팠던 정경화는 직접 무대에 나가 연주 취소를 알리고 28일 연주는 예정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무리한 연주로 이어졌다. 28일, 정경화는 무통주사까지 맞고 손가락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 브람스 대신 브루흐를 연주했다. 이 연주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게 관계자의 중론이다. 손가락 부상이 악화돼 연주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 뒤 긴 공백기가 이어졌다. 팬들의 아쉬움도 컸지만, 정작 정경화 본인은 “미칠 정도로” 연주를 하고 싶어했다. 오직 그 일념 하에 치료에 매진했다. 지성이면 감천. 희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2011년 8월 대관령에서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다. 객석은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길고 긴 기립박수를 보냈다.


손가락 부상 딛고 불굴의 의지로 돌아오다

 정경화는 이 연주로 우리 곁에 돌아오리란 의지를 세상에 알렸다. 정경화의 성공적인 회복 소식은 유니버설 본사로 빠르게 타전되었고, 정경화의 숙원이던, 바흐와 모차르트 녹음에 전격 합의했다. 유니버설은 정경화의 모든 조건을 수용하였고, 현재 계약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몇 년 전 정경화는 필자와 인터뷰하며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 빈 필과 연주를 하고 왔어요. 빈에서 이 사람들이 가진 클래식 전통의 향기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에 심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 시대에 맞는 스타일이 나오지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음악의 중심은 바흐라고 생각합니다. 모차르트나 브람스는 그 핵심을 지키면서 또 다른 전통을 만들어 낸 경우가 아닐까요. 우리나라 연주자들이 각 분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클래식 음악의 깊이를 더하는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백전노장의 경륜을 갖춘 예인 정경화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말하는 음악의 중심 ‘바흐’로 향할 준비를 끝냈다. 불꽃 튀는 열정과 비르투오시티의 뒤안길에서 자신이 깨달은 음악의 정수를 나누기 위해 다시 그녀가 오고 있다. 딩동댕, 우리는 다시 콘서트홀 객석에 앉아야 한다. 대한민국 클래식 넘버원의 전설, 정경화의 음악인생, 그 3막이 시작된다.



자료 담당자 :
공연기획팀 Tel. 053-430-7665
최근자료수정일 :
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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